북쪽의 이민족인 여진족의 금(金)나라에 의해 송(宋)나라가 망하고 남은 세력이 다시 지금의 항주로 근거지를 옮겨 다시 송나라(역사에서는 남송이라고 부름)를 세운 무렵에 태어난 주희(朱熹 1130~1200)는 왜 나라가 이처럼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리게 됐는가를 깊이 생각하다가 그것이 불교와 도교 때문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위진(魏晋)남북조와 수(隋),당(唐)시대를 거치면서 유학은 침체되고 불교(佛敎)와 도가(道家)가 유학을 압도하게 되는데, 이들은 군신(君臣) 부자(父子)라는 사회적 관계를 부정하고 오로지 마음의 평안을 구하고자 하며, 도덕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만을 강조하다 보니 결국 인의까지도 망가지므로 해서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천하가 어지러워진다는 생각이었다.
한때 불교와 노자의 학문을 열심히 공부했으나 24살 이후 유학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며 유학에 복귀한 주희는 11세기 북송(北宋)의 대표적인 학자 주돈이와 정호·정이 형제 등의 학문을 이어받아 새로운 유학을 연다. 그 유학은 과거처럼 경전의 해석을 중요시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며, 경전과 성현의 말씀을 다시 새겨 우주의 원리를 새롭게 규명하고, 이를 자신의 수양의 기본원리로 삼아, 보다 완전한 인간을 완성하게 한 후, 이들이 국가를 다스리므로서 천하를 안정되게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서 당시 유행하던 불교의 참선법을 발전적으로 극복해 인간의 도덕적인 본성이 무엇인지를 규명했고, 몸과 마음이 참된 길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평생 성찰하는 모범을 보인다.
주희에게 있어서 가장 빛나는 시기는 47살 때부터 60살 때까지로서, 이 때에 그는 그동안의 학문연구를 바탕으로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을 잇달아 써내면서 전통적으로 중요시하던 오경(五經) 대신에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이른바 사서(四書)의 새로운 해석을 완성하고 있다.
이 시기에 주희가 살던 곳이 복건성에 있는 중국남동부 제일의 명산인 무이산(武夷山)이다. 무이산은 예로부터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암석, 2개의 병풍절벽, 8개의 고개, 3개의 바위암봉이 있고, 계곡도 많아 4개의 계곡, 9개의 여울, 5개의 웅덩이, 11개의 골짜기, 13개의 샘이 있다고 한다. 주희는 이처럼 물과 바위가 어우러진 명산의 한 가운데에 무이정사(武夷精舍)라는 일종의 사학 겸 연구소를 세우고 거기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친다. 53살이 되던 해에 그는 자신이 개척한 학문의 새로운 영역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자 이 무이산 계곡의 굽이굽이 아름다움을 빗대어 자신의 학문적인 성취를 자랑하는 시, 무이도가(武夷櫂歌) 10수를 지었다. 이 시들은 무이산의 아홉 골짜기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묘사해, 흔히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라고도 부른다.
"동주에서 공자가 나왔고 남송에는 주희, 곧 주자가 있으니, 중국의 옛 문화는 태산과 무이로다(東周出孔丘 南宋有朱熹 中國古文化 泰山與武夷)"
란 말이 있다. 주나라의 공자가 태산에서 유학을 창시하였듯이, 남송 때 주희는 무이산에서 신유학인 주자학을 성립하였다는 말이다. 이처럼 무이산은 주자가 완성한 신유학 즉 성리학을 배출한 성지이다. 그러기에 주자의 학문을 이어받은 조선시대 선비들은 주희가 머물던 무이정사에서 서원의 모범을 찾았고,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읊으면서 주자를 흠모했다.
주희는 무이구곡가로 본격적인 경치묘사를 하기 전에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山無水不秀 산은 물이 없으면 수려하지 않고
水無山不淸 물은 산이 없으면 맑지 못하다.
曲曲山回轉 골짜기 골짜기마다 산이 돌아가고,
峯峯水抱流 봉우리 봉우리마다 물이 감아돈다.
무이산을 흐르는 물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이 물이 없으면 무이산도 한갓 메마른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주희는 이 무이산을 하류에서부터 상류로 올라가면서 묘사하고 있다. 이 때의 물은, 끊임없이 궁리하고 성찰하는 선비들의 맑은 지성이라고 풀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도 이러한 것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 들어있다고 보인다.
몇 달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이 무이산을 관광하는 코스가 개발돼 사람들이 많이 구경하고 있다. 그런데 그 관광코스는, 대나무로 된 배를 타야하는 관계로, 상류에서부터 하류로 내려오는 코스로 설정돼 있어 주희가 읊은 무이구곡가의 진행방향과는 거꾸로이다. 실제로 이렇게 상류에서부터 내려오는 식으로 구곡가를 읽으면 주희의 원래 의도와도 배치될 수 있다.
조선왕조로 내려와 동방의 유학에 새 장을 연 퇴계는 도산서원을 열고 후학들과 연구를 계속하면서 무이산에서 학문을 이룬 주희를 자신의 생활의 모범으로 삼는다. 그리고는 주희의 무이구곡가의 운을 빌어서 새로 10수의 한시를 짓는다. 이 「차무이도가(次武夷櫂歌)」 10수는 주희에 대한 퇴계의 존경심이나 퇴계의 시를 짓는 능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신유학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회암(晦庵:주희의 호)과 퇴계의 차이를 엿보게 한다는 뜻에서 대조가 되고 있다.
주희가 지은 무이구곡가의 첫머리는 무이산에 대한 개황이다.
武夷山上有仙靈 무이산 위에는 신선의 靈이 있고
山下塞流曲曲淸 산아래 골짜기는 굽이굽이 맑도다
欲識箇中奇絶處 가장 멋있는 곳 알려고 한다면
櫂歌閑聽兩三聲 뱃노래 두 세 가락 천천히 들어보소
단순한 경치만을 읊은 것 같지만 사실은 이 경치를 학문의 경지를 설명한 것으로도 해석한다. 학문을 하면 그리 멋있는 선경에 들어간 것 같다는 뜻이리라. 여기에 대해 퇴계는 靈,淸,聲의 세 운자를 그대로 받아서 다음과 같이 완곡하게 표현한다. 자신은 주희를 따라 깊은 학문의 경계를 들어가 보고 싶다고 한다.
不是仙山타異靈 신령스런 산이라 놀자는 게 아니라(타=言+宅)
滄洲遊跡想餘淸 주희 있던 유적 보려는 것
故能感激前宵夢 어젯밤 꿈에 선생 본 감격 살려
一櫂갱歌九曲聲 구곡가 운을 빌어 다시 노래하세
여기서부터 무이산의 아홉 계곡을 들어간다.
일곡, 즉 첫 계곡의 북쪽에는 대왕봉이 솟아있고 대왕봉 왼쪽에 만정봉(巾+曼亭峯)이 있다. 만정봉은 해발 500미터정도의 산으로, 도가(道家)의 무이군(武夷君)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 2년 가을에 무이군이 허공에 무지개 다리를 놓고 여러 신선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一曲溪邊上釣船 / 만亭峰影잠晴川 / 虹橋一斷無消息 /萬壑千巖鎖翠煙
일곡 강가에서 낚시배에 오르니 만정봉이 맑은 물 속에 잠겨있네
무지개 다리 끊어진 후 소식 없고 골짜기 봉우리마다 푸른 안개 자욱
이 첫째 계곡은 그냥 보면 만정봉의 경치를 설명한 것 같지만, 사실은 공자 이후에 학문이 끊어져 사람들이 가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시에 대해 퇴계는 선, 천, 연의 세 운자를 살려 학문을 시작한 이후 세상과의 인연을 멀리할 수 밖에 없음을 전하고 있다;
我從一曲覓漁船 天柱依然瞰逝川 一自眞儒吟賞後 同亭無復管風煙
일곡에서 어선 찾아갔더니 천주봉은 의연히 내를 굽어보고 있네
참 선비 이곳서 시 지어 읊은 뒤로 동정의 좋은 풍경 더 못 보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