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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무이산 (武夷山) 무이구곡

  山無水不秀 水無山不淸
  (산무산불수 수무산불청)
  산은 물이 없으면 수려하지 않고,
  물은 산이 없으면 맑지 못하다.

  曲曲山回轉 峯峯水抱流
  (곡곡산회전 봉봉수포류)
  골짜기 골짜기마다 산이 돌아가고,
  봉우리 봉우리마다 물이 감아돈다.

일 곡 (一 曲)
"일곡 시내가에서 낚시배에 오르니
만정봉이 맑은 물속 푸른 하늘에 잠겨있네
무지개 다리는 한번 끊어진 후 소식이 없고
골골마다 암봉에는 비취 빛 안개가 자욱하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일곡 -

 일곡 계곡의 북쪽에는 대왕봉이 솟아있고 대왕봉 왼쪽에 만정봉(만巾+曼亭峯)이 있다. 만정봉은 해발 500미터정도의 산으로, 도가(道家)의 무이군(武夷君)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 2년 가을에 무이군이 허공에 무지개 다리를 놓고 여러 신선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곳에도 가학선관읜 흔적이 있다.

o수광석(水光石)
 수광석은 청천석(晴天石)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도 천애절벽이 계속되고, 암벽에는 마애석각의 글이 많다.
제시암에는 명나라때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시도 있다. 척계광은 왜구를 정벌하여 명성이 높은 장수였는데 황제의 부름을 받아 북벌을 하러 가는 길에 무이산에 들러 이 시를 새겼다고 한다.
 "대장부가 이미 남쪽에서 왜구를 정벌하고, 이제 북쪽에서 오랑캐를 평정하려 하니, 황금관에 도포를 입고 다시 올 것을 기약하노라"(大丈夫旣南靖島夷 便當北平胡虜 黃冠布袍 再期游此...)"

o대왕봉(大王峯)
 대왕봉은 무이산에서 가장 웅장한 바위산으로 옥녀봉 맞은편에 있다. 높이는 해발 300여m이지만, 구름을 뚫고 하늘을 받치고 우뚝 선 모습이 영웅의 형상을 하였다. 전설에서 대왕은 근면, 용감, 지혜의 미덕을 갖춘 이상적인 남성이었다.
 바위틈으로 좁은 길이 대왕봉 정상으로 통하는데 몸을 굽히고 무릎으로 기어 산 정상에 오르면 무이산 지역 일대가 한눈에 펼쳐진다.

 무이구곡은 일곡에 이르러 숭양계(崇陽溪)로 들어간다.

  주자의 무이구곡가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읊어졌다. 무이구곡가로 인해 무이산의 구곡은 더욱 유명해졌고,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런 류의 노래를 지어 "뱃노래는 주자에서 시작된다"(棹歌首唱自朱子)고 하였다.

이 곡 (二 曲)

"이곡에 우뚝 솟은 옥녀봉이여
꽃을 꽂고 물가에 서 있으니 누구를 위해 꾸몄는가
도인은 황대몽(荒臺夢)을 다시 꾸지 않는데
흥에 겨워 앞산에 들어가니 푸르름이 첩첩이네"
_ 주자, 무이구곡가 중 이곡 -

 이곡에는 옥녀봉이 무이산에서 가장 수려한 자태를 자랑한다. 옥녀봉 아래에는 목향담(沐香潭)이 있고, 옥녀봉 왼쪽에는 면경대(面鏡臺)가 있어 이곡의 산수는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이 수려하다. 주자의 이곡가는 이러한 경치를 읊은 것이다.

o옥녀봉(玉女峯)
 이곡에 이르러 무이산에서 가장 수려하다는 옥녀봉을 만난다. 정상에는 나무가 자라고 절벽은 광택이 나서 마치 옥석을 조각한 모습으로, 절색의 소녀가 맑은 물가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형상을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옥녀는 옥황상제의 딸이었다. 하늘에 살던 옥녀(玉女)는 아버지 몰래 구름을 타고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가 무이구곡의 산수에 매료되어 돌아갈 줄을 몰랐다. 우연히 대왕(大王)과 알게 되어 서로 사랑을 하여 자식을 낳고 인간세계에 살았다. 이를 본 철판도인(鐵板道人)이 옥황상제에게 고하자, 옥황상제가 크게 노하여 철반도인에게 옥녀를 잡아오도록 했다. 옥녀는 대왕과 같이 인간세계에서 살고자 하여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철반도인은 마법을 써서 옥녀와 대왕을 돌로 만들어 계곡의 양쪽에 두어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옥녀봉과 대왕봉 사이에는 철판장(鐵板障)이란 병풍 바위(障)가 있는데, 철판도인이 대왕봉과 옥녀봉이 만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라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관세음보살이 대왕과 옥녀를 불쌍히 여겨 옥녀봉 맞은편에 면경대(面鏡臺)를 두어 서로 얼굴을 비춰보게 하였다고 한다.
 옥녀봉 아래에는 옥녀가 목욕했다는 욕향담(浴香潭)이 있고, 네모난 인석이 있다. 옥녀와 대왕의 정표라고 한다.

삼 곡 (三 曲)
"삼곡에서 그대는 가학선을 보았는가
노젖기를 그친지 몇 해인지 모르겠네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된 것이 지금부터 언제런가
물거품같고 바람 앞 등불 같은 우리 인생이 가련하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삼곡 -

 삼곡에는 험준한 암벽으로 된 소장봉이 있고, 소장봉 바위굴에는 홍교판와 가학선관이 있다. 주자는 가학선관을 고대 중국의 남방 소수민족이 사용하던 관(棺)으로 보았는데, 가학선관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읊고 있다.

o소장봉(小藏峯)의 홍판교(虹板橋)와 가학선관(架壑船棺)
 와룡담을 돌아가면 또 천길 절벽의 소장봉이 나온다. 소장봉에도 아득한 절벽위 틈사이에 배모양의 목제 관이 있으니 홍판교(虹板橋)와 가학선관(架壑船棺)이다. 전설에 이르기를 가학선관은 신선이 하늘로 날아가면서 남긴 배(舟)로서 배안에는 유골이 있었다고 하는데, 비바람에도 썩지않고 천년을 그대로 있다.
 가학선관(架壑船棺)은 골짜기에 설치한 배라는 뜻으로 배 모양의 관(棺)을 말하고, 홍교판(虹橋板)은 무지개 다리판이니 선관을 고정시키기 위한 목판이다. 천애 절벽위에 있는 가학선과 홍교판은 사람들에게 많은 호기심을 자극하여 신선의 전설을 담고 있다.
 주자는 가학선관을 고대 남방 소수민족이 사용하던 관이었다고 보았다. 무이 선관은 은(殷)나라 말기에서 시작하여 주(周)나라 초기까지 있었다고 하니, 3800여년 복건성에 살던 소수 민족의 유물이 된다.

사 곡 (四 曲)
"사곡의 양쪽에는 두개의 바위산이 있는데
바위틈 꽃에는 이슬이 맺혀 푸르르네
금닭(金鷄)이 울어 아침을 열지만 아무도 본 이가 없고
달은 텅빈 하늘에 가득하고 물은 웅덩이에 가득 차있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사곡 -

 사곡에는 거대한 암산인 대장봉과 선조대가 마주보고 있다. 대장봉 암벽 중간의 금계동굴(金鷄洞)에는 새벽을 알리는 금닭이 있었다고 하고, 그 아래에는 무이구곡에서 가장 깊은 와룡담(臥龍潭)이 있다. 대장봉과 선조대 절벽에 핀 꽃은 이슬을 머금고 있고, 새벽에는 금닭이 울고 밤에는 달빛이 와룡담에 그윽히 비치는 사곡의 정경을 읊었다.

o대장봉(大藏峯)
 사곡으로 돌아 들면 엄청난 바위산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름하여 대장봉이라 했으니, 도가(道家)가 대장경(大藏經)을 숨겨둔 곳이라고 한다.
 대장봉의 수십길 절벽에는 두개의 작은 굴이 있다. 위에 있는 굴을 구과암(鷗穴+果巖)이라 하는데, 굴안에는 벼(稻草)가 자란다. 언제 누가 갖다 놓았는지도 모르고 몇백년이 지났는지도 모르지만 지금도 스스로 열매를 맺고 자란다고 한다. 아래에 있는 굴이 금계동(金鷗洞)이다. 이 굴안에는 선관(船棺)이 있다.

o제시암(題詩巖)
 대장봉 아래의 와룡담(臥龍潭)은 구곡중에서 가장 깊은 곳이다. 와룡담에 이르러 뱃사공은 길다란 대나무 삿대를 물속에 집어넣지만 끝에 닿지는 않는다.
 대장봉 건너편에 제시암이 있는데, 암벽에 석각의 시를 가득 새겨 놓았다. 무이산에는 400여곳의 마애석각이 있다는데, 제시암이 가장 대표적인 곳이다.

o선조대(仙釣臺)
 사곡의 북쪽에 선조대가 있으니, 신선이 낚싯대를 드리우던 곳이라고 한다. 선조대 절벽위 바위틈에는 낚시대 한개가 비스듬히 나와있다. 천년을 두고 썩지도 않고 그대로 있어 무슨 물건인지 알 수없는데, 사람들은 강태공이 이곳에 와서 낚시질을 했다고 한다.

오 곡 (五 曲)
"오곡은 산이 높고 구름이 깊어
언제나 구름비에 평림(平林)은 어둑하네
숲 사이의 나그네를 알아보는 이 없고
뱃사공의 노래 소리에 만고의 수심이 깊어지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오곡 -

 오곡은 무이구곡의 중심이다. 계곡 북쪽에는 은병봉(隱屛峰)이 우뚝 솟아있고 그 아래에는 주자가 세운 무이정사가 있다. 이 시의 높은 산은 은병봉을 가리키고, 평림(平林)은 무이정사로 들어가는 초입의 지명이다. 산은 높고 구름이 깊어 연우가 항상 평림의 입구에 가득한데, 나그네 즉 주자가 수풀 속을 거닐 때 들려오는 뱃사공의 노래 소리에 만고의 수심이 깊어지는 감정을 노래했다. 이 노래중에서 "뱃사공의 노래 소리에 만고의 수심이 깊어지네"의 "애(矣+欠)乃聲中萬古心"은 "애내성중만고수(愁)" 등으로 우리 민요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o갱의대(更衣臺)
 갱의대는 신선이 잔치에 가려고(또는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곳이라고 하며, 또는 선인이 신선이 되어 날아간 곳이라고도 한다. 목욕갱의(沐浴更衣) 갱의승천(更衣昇天) -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을까? 옷을 갈아입고 하늘로 올라갔는가?

o호리동(狐狸洞)
 경의대를 지나면 까마득한 절벽위에 작은 집이 있다. 호리동이라 하니, 여우굴이란 말이다. 명나라때 저명한 도사의 도량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남명정(南溟靖)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주자의 애정 고사가 담긴 곳이다.

육 곡 (六 曲)
"육곡의 시퍼런 병풍 바위는 푸르른 물굽이를 휘감아 돌고
종일토록 이끼는 사립문을 덮고 있네
나그네가 노에 몸을 기대니 바위에서 꽃이 떨어지는데
원숭이와 새가 놀라지 않고 봄빛은 완연하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육곡 -

 무이구곡은 육곡에 이르러 북쪽에 우뚝 솟은 쇄포암을 바라보며 휘감아돈다.  쇄포암에는 수천 수만의 물줄기 자국으로 쭉쭉 내리뻗은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쇄포암 아래는 산을 등지고 계곡을 앞에 둔(面溪背山) 그윽한 곳이어서, 주자는 이곳에서 저절로 바위꽃이 떨어지고 원숭이와 새가 놀라지 않는 자연의 극치를 노래하였다.

o향성암(響聲巖)
 육곡에 들어서면 계곡 양쪽에 높은 절벽이 막아, 여기에서 소리를 지르면 양쪽 절벽에 메아리가 부딪치며 멀리 퍼져나간다. 그래서 이름하여 향성암이다.
 향성암의 절벽에는 송(宋) 원(元) 명(明)대의 마애석각(磨崖石刻) 20여개가 있다. 그 중에는 주자가 새긴 "서자여사"(逝者如斯)란 글도 있다.
- 쇄포암

 육곡에서 크게 물굽이를 치는 곳에 무이산 제일의 바위산이 있으니 쇄포암(日+暴布巖)이다. 천유봉 아래로 도끼로 깍은듯한 수십길의 바위가 절벽을 이루었는데, 수직으로 내리뻗은 절벽에는 수천 수만의 폭포가 흐른 자국이 있어 마치 길다란 흰색 천을 걸어 햇볕에 말리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웅장한 모습이 신선의 손바닥 같다고 하여 선장암(仙掌巖)이라고도 하였다. 암벽 아래에는 "벽립천인(壁立萬人+刃)"이란 석각이 있는데 "만길 절벽"이란 말을 실감케 한다.

 

o천유봉(天遊峰)
 천유봉은 천길의 절벽위에 암봉이 우뚝 솟은 무이산 최고의 절경이다. 그래서 옛부터 천유봉을 무이산 제일의 경치(武夷第一勝景)라 했고, 천유봉에 오르지 않으면 무이산을 구경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실같이 이어진 좁은 길을 올라 정상에 이르면 수많은 봉우리가 내려다 보이고, 구곡의 돌아드는 모습이 완연히 눈에 들어온다.

천유봉은 높이로 말하면 삼앙봉에 미치지 못하고, 우뚝한 모습으로 말하면 대왕봉에 미치지 못하고, 수려함으로 말하면 옥녀봉에 비치지 못하고, 험한 것으로 말하면 접순봉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천유봉은 육곡에 위치하여 절경이 제일이다.
 그래서 천유봉에 오르면 도교의 이상세계인 봉래선경(蓬萊仙境)에 들어선다고 했다. 천유봉 정상에 있는 천유각(天遊閣)은 도교의 천궁(天宮)을 본따서 만든 것이라 한다.

o접순봉(接筍峯)
 천유봉 맞은편에는 첨예하게 솟은 바위산이 있다. 커다란 바위산에는 세갈래의 균열이 생겨 세 개의 암석같은데, 마치 대나무 순이 솟는 모양이다. 다동의 남쪽에서 올라가는 길은 좁은 계단이 까마득한 정상까지 가파르게 이어져 아찔한 느낌을 준다.
 전설에 의하면 접순봉 아래에 석당사(石堂寺)란 절이 있었는데 1명의 부지런하고 착한 승려와 99명의 게으르고 나태한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 깍아지른 절벽 아래에는 육병(肉餠)이라 부르는 세 개의 바위덩어리가 있는데, 게으른 99명의 승려가 떡이 된 것이라고 한다.

o운와(雲窩)
 운와는 구름이 나온다는 굴이다. 굴속에서 항상 하얀 구름이 피어올라, 모이고 흩어지며 온 산에 퍼져 나가 운무(雲霧)의 환상을 이룬다
 무이산의 구름은 천만가지의 자태를 자랑하여 계절에 따라 구름 모양이 다르고, 아침 저녁으로 구름 모양이 다르고, 날씨에 따라 구름 모양이 모두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무이산의 구름은 운해(雲海), 운룡(雲龍), 불광(佛光), 홍교(虹橋), 탄운(呑雲), 와운(臥雲) 등의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o다동(茶洞)
 천유봉 오르기 전에 다동이 있는데, 무이산에서 가장 좋은 차가 나온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사방 주위로는 천길 절벽이 둘러싸서 시원한 피서처가 된다.
 무이산은 바위틈에서 자라는 암차(巖茶)가 유명하여 원나라때에는 황실의 다원이 있었다. 무이산 암차는 중국 10대명차의 하나인데, 그중에서 대홍포(大紅袍)가 가장 진귀하다.

o무이정사(武夷精舍)
 천유봉 가는 길에 무이정사가 있다. 1183년에 주자가 만든 정사이다. 주자는 이곳에서 10년동안 있으면서 학문을 논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무이정사에는 인지당(仁智堂), 은구실(隱求室), 지숙재(止宿寮), 관선재(觀善齋), 한서관(寒棲館), 만대정(晩對亭), 철적정(鐵笛亭) 등의 많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무이정사임을 알리는 팻말과 허물어진 건물만 남아있어 무이정사를 찾는 나그네의 마음을 허전하게 한다.
(무이산의 주자 유적에 대해서는 차후 자세히 정리할 예정이다.)
 무이산 대왕봉 아래에는 주자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이학정종(理學正宗)" 등의 현판과 주자상을 두었고 회랑에는 주자의 일생을 전시하고 있다.

o무이궁(武夷宮)
 주자기념관옆에는 도교의 궁관인 무이궁이 있다. 무이궁은 무이산에서 가장 오래된 궁관이다. 당나라때인 742-755년사이에 설치되어 송나라때는 300여칸에 이르렀고 "충우만년궁(沖佑萬年宮)"이란 사액을 받았다. 송나라때는 주자, 육유, 여조겸 등 25명의 유명한 학자가 충우관에 와서 제사를 주관하여, 매년 가을 무이군(武夷君)에게 제사하였다. 현재는 용정(龍井)과 만년궁(萬年宮), 삼청전(三淸殿) 등이 남아있다.

칠 곡 (七 曲)
"칠곡에 배를 몰아 푸른 여울에 올라서
은병봉과 선장암을 다시금 돌아보네
사람들은 이곳에 좋은 경치가 없다지만
텅빈 하늘에는 석당(石堂)이 해맑게 솟아있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칠곡 -

 칠곡에는 달공탄(獺控灘)이란 여울이 있다. 달공탄에서 아래쪽을 보면 육곡에 은병봉과 선장암(쇄포암)이 보이고 석당이라는 커다란 바위가 솟아있다. 배가 칠곡으로 올라감에 은병병과 선장암이 돌아보는 듯하고 석당이 하늘 높이 솟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다른 본에는 칠곡가의 뒷귀절을 "지난 밤 봉우리에 비가 내리더니, 나는 듯한 물줄기가 몇 줄기런가"라 되어 있다.

o삼앙봉(三仰峯)
 칠곡에 들어서면 멀리 삼앙봉이 보인다. 해발 717미터로 무이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커다란 세개의 봉우리가 층층히 일어나 하늘을 향해 머리를 내고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렇지만 산이 높고 길이 험해 아직 계단이 없어 여기에 오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다.

o 도원동桃源洞)
 높은 산이 물가에 솟아 절벽을 이룬 금계동(金鷄洞)을 지나 방생담(放生潭)의 물이 돌아가는 곳에 도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인 도원동으로 들어가는 산문이 있다도원동문을 들어서면 뽕나무와 연못이 있고 복사꽃이 만발한 이상세계가 그곳에 있다. 그래서 이곳은 인간세계 바깥의무릉 도원(世外桃源)이라 한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숭아 꽃은 아득히 물에 흘러가는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별천지가 있으니 인간 세계가 아니로다
-도연명(陶淵明) -

팔 곡 (八 曲)
"팔곡에 바람 불어 구름이 개려 하는데
고루암(鼓樓巖) 아래에는 물이 돌아드네
이곳에 좋은 경치가 없다고 말하지 말게
여기부터 속인은 올라갈 수 없다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팔곡 -

 팔곡은 산이 높아 물살이 빠르고, 각종 동물 모양의 바위가 많다. 고루암 아래에는 사자모양을 한 바위도 있고, 거북 모양을 바위도 있다. 그런 팔곡의 정경을 사람들은 별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느덧 신선이 사는 곳이 가까왔음을 말하고 있다.

o품자암品字巖)
 팔곡의 북쪽에는 3개의 커다란 바위가 품(品)자 모양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품자암은 삼교봉(三敎峯)이라고도 하는데,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의 삼교를 가리킨다.
 품자암이란 이름에서 보듯이, 무이산에는 유 불 도의 삼교가 모두 들어있다. 유가로 말하면 주자의 무이정사요, 불가로 말하면 극락국이요, 도가로 말하면 도원동이다.

o 쌍유봉雙乳峯)
 쌍유봉은 팔곡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팔곡의 북쪽에 있다. 바위의 풍만한 모습이 어머니의 젖가슴과 같다고 하여 쌍유봉이라 한다. 연꽃 봉우리가 나란히 있는 모습이라고 하여 병연봉(幷蓮峯)이라고도 한다.

o 수상동물원水上动物园
팔곡에는 사자, 낙타, 코끼리,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많아 물위의 동물원이라고 부른다.

구 곡 (九 曲)
"구곡에 다달으니 눈앞이 활연히 트이는데
상마(桑麻)에 맺힌 이슬, 평천(平川)을 바라보네
뱃사공은 다시금 무릉 도원가는 길을 찾지만
이곳이 바로 인간 세계의 별천지라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구곡 -

  평천은 구곡의 끝에 있는 지명이다. 이곳은 개천이 평평하게 흐르는데, 뽕나무 삼나무가 들을 채우고 기름진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이 있어 무릉도원의 경치라고 한다. 이곳에 와서 또다시 별천지를 찾으려 하지만 이곳이 바로 이상세계라고 노래하였다.

 o백운암(白雲巖)
 구곡에는 백운암이 있다. 남송때 학자인 여조겸(呂祖謙)이 머물며 학문을 닦던 곳이다.
 백운암옆에는 극락국(極樂國)이란 바위굴이 있다. 극락은 불교의 이상세계로서, 극락국에서 거주하면 마음을 정화하여 인간의 번뇌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한다. 극락국은 암벽 중간에 걸려있어 "무릎으로 기고 뱀같이 업드려서"(膝行蛇伏) 가야 한다고 한다.

무이산 수렴동
o수렴동(水簾洞)
 수렴동은 무이산에서 가장 큰 바위굴이다. 높이는 100여m에 이르는데, 정상이 비스듬히 앞으로 나와있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암벽 위에는 물이 흘러 정상에서 아래로 폭포를  이룬다. 물이 떨어져 생긴 웅덩이에는 용이 산다고 해서 목룡담(沐龍潭)이라 한다. 비가 와서 물이 많을 때는 물줄기가 허공에 떠서 무려 100여m를 내리친다고 하니,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란 말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o삼현사(三賢祠)
 수렴동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는 집 한채가 있으니 삼현사(三賢祠)이다. 삼현사는 유자휘(劉子휘)와 주자(朱子), 유보(劉甫)를 모신 사당이다. 유자휘는 무이산 오부리(五夫里)에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은거하여, 병산선생(屛山先生)이라 불린 남송때의 학자이다. 유자휘는 주자의 스승으로서, 주자를 데리고 수렴동에 와서학문을 가르쳤다. 그래서 주자가 소년기에 가장 많은 것을 배운 스승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유보도 수렴동에 은거하여 주자, 채원정(蔡元定) 등과 교유한 남송때 학자이다. 수렴동 암벽에는, 1181년 7월 23일에 주자와 채원정이 유보의 초청을 받고 수렴동을 유람했다는 내용의 주자가 손수 쓴 글이 남아있다. 1147년 유자휘가 서거한 후 수렴동에 병산선생사당을 세우고 주자가 쓴 "백세여견(百世如見. '영원히 뵙는 듯하다'는 뜻)"의 현판을 붙였다. 그후 유보와 주자가 서거한 후 유자휘의 좌우에 모시고 삼현사라 칭했다. 청나라때는 승려가 삼현사를 점거하기도 하고, 후에는 공자,노자, 석가를 모시고 삼교당(三敎堂)이라 한 적도 있는데 1944년에 다시 삼현사의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